여행지의 벽에 적은 시 / 류시화
그대가 떠나는 것은 집이 아니라
어제까지의 그대 자신
그대가 뒤로하는 것은
발목을 붙잡는 손이 아니라
불과 어름의 감정들
책상 속에 두고 가는 것은 일기장이 아니라
고장 난 시계와 부서진 자아.
서랍 뒤쪽에 구겨진 채 숨겨진 계획표
상처를 상처라고 부르기 위해
원했던 것과 원하지 않았던 것 모두
내려놓고 떠나는 자.
그대는 세상과 싸우러 가지 않는다
자기 자신과도 더 이상 싸우지 않을 것이니
가져가야 할 것만 배낭에 넣고
새벽 기차역으로 향하는 가벼운 발걸음이
그대 존재의 무거움을 받쳐 주기를.
가는 곳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
장소일 것이니
그곳들은 그대가 오기를
기다리고 있었으니
낯선 길에서 그대가 잡는 손들이
온을 그려 그대를 껴안아 주기를
그 원 안에서 소유하지 않고
사랑하는 법을 배우기를...
'♡ 좋은글에 사진을..' 카테고리의 다른 글
#54 청개구리의 후회. (24) | 2024.07.16 |
---|---|
#53 길의 노래.. (8) | 2023.12.14 |
#52 흩날리는 잎.. (20) | 2023.11.16 |
내 마음 갈 곳을 잃어.. (21) | 2023.11.04 |
#50 (14) | 2023.09.08 |